독서 후기: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표지 사진

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에서 신간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데이비드 이글먼 저, 김승욱 역)를 보내주셔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협찬

그러니까 #내돈내산 리뷰는 아닌 셈이지만, 사실 너무 재미있어서 전자책으로 사서 가지고 다닐지 고민이 될 정도였어요. (한국어 번역본은 아직 전자책으로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이 책의 특별함에 대해 이야기해 봅니다.

제 경험상 사람의 뇌나 심리를 다루는 교양 서적은 보통 세 가지 문제 중 하나 이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계발서의 심연으로 빠지거나, 과학적 방법론을 배제하고 감성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더럽게 재미가 없다는 거죠. 이 책은 놀랍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독자에게 뇌를 '개선'하기 위한 사고방식을 강요하지도 않고, 과학적 사실에 충실하며, 동시에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저자인 데이비드 이글먼이 '뇌과학의 칼 세이건'에 비유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1만 시간의 법칙, 자기계발서의 심연

'자기계발서의 심연'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해 봅시다. 뇌가소성을 다룬 책들 중에는 자기계발서의 심연으로 빠지는 것들이 제법 많습니다. '뇌는 유연하니까 당신이 노오력을 하면 어떻게든 뇌가 변해 줄 것이다' 식이죠. '1만 시간의 법칙'을 기억하시나요? 어떻게든 1만 시간을 들이기만 하면 최고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격려는 달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1만 시간을 들이는 것은 대체로 맞지만, 1만 시간을 들인 모든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최고에 오르는 사람들은 그보다 조금 못 하는 사람들보다 적게 연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타고난 조건 같은 것들도 영향을 미치겠지만(이러한 다른 영향에 대해서도 책 전체에 걸쳐 제법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6장에서는 뇌의 학습에 보상이 주는 영향을 설명한 다음 1만 시간의 법칙에 대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단서를 덧붙입니다.

아세틸콜린이 없으면 1만 시간의 연습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p.217)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저자는 아세틸콜린의 역할, 아세틸콜린이 분비되는 조건, 관련된 동물실험 결과 등을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책에 등장하는 내용을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근거를 제공하면서도, 비유와 예시를 촘촘히 끼워넣어 지루할 틈이 없게 하죠.

교훈은 우리의 몫

가장 좋은 점은, 저자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한 뒤에 '그러니까 아세틸콜린이 풍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결론으로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훈을 얻어갈지는 우리의 몫이고, 저자는 우리가 스스로 지식과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그 바탕을 마련해 줄 뿐입니다. 책은 '자발적인 동기를 가지고 연습할 때 아세틸콜린이 분비되어 학습이 빨라진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고, 거기에서 '재미있는 일에 더 몰두해야겠다'는 결론을 얻을지, '재미없는 공부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결론을 얻을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책의 전체가 이렇게 정보를 알려 주는 역할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정보를 얻어낼 때까지 우리의 눈길을 붙잡아 두기 위해 탁월한 글솜씨를 발휘합니다. 우리에게 책을 끝까지 읽기를 강요하거나 책을 읽지 않으면 인생이 불우할 것이라고 위협하지도 않습니다. 책을 본격적으로 여는 1장 끝머리에서, 저자는 '이 책을 읽고 나면 여러분의 뇌가 바뀔 것'이라고 설득하는 대신 담담히 이렇게 통보합니다.

이 책을 이제 겨우 몇 페이지 읽었을 뿐인데, 여러분의 뇌는 이미 변했다. 종이에 나열된 이 기호들이 신경 연결점의 광대한 바다 전체에서 아주 작은 많은 변화를 조율해 여러분을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와는 아주 조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p.30)

상상의 나래

책에서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들만을 나열하는 것은 아닙니다. 곳곳에 '내 생각에는...'으로 시작하는 저자의 사견이 끼어 있죠.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견해와 확실한 사실을 명확하게 분리합니다. 저자는 이해가 어려운 부분을 더 쉽게 이해하도록 자신의 견해를 첨가하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엄청나게 흥미진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합니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통해 타고난 신체에 구애받지 않는 새상, 생물학적 원리를 적용한 기계들이 스스로 적응하며 회복하는 세상에 대해 상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과학적 사실에 대해 더 많이 알아내고 싶어집니다.

진짜로 있었던 일들

상상의 나래는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책의 모든 부분에서 이론은 그 이론이 현실에 적용된 예시와 함께 등장합니다. 마비를 겪은 환자가 재활을 하는 과정이든, 공감각 능력에 알파벳 자석 세트가 주는 영향이든, 알츠하이머 병이 상당히 진행되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를 만큼 건강한 인지능력을 유지했던 사람들이든, 이 예시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과 우리 스스로에 이론들을 대입해 보며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저자가 창립자 및 CEO로 재직 중인 네오센서리의 제품들에 대한 예시였는데, 네오센서리 제품이 어떻게 동작하는지 설명하는 저자의 TED 강연을 링크해 놓겠습니다. 책에는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역시 책을 읽어 보시는 게 더 좋습니다.

근본에 충실하게

잘 쓰여진 과학 교양 서적의 장점은 수백 편의 논문을 읽지 않아도 대략적으로 밝혀진 사실들의 얼개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그러한 측면에서 매우 잘 쓰여진 책이지만, 혹시라도 수백 편의 논문을 읽는 것을 선호하는 부류의 사람이라면, 책의 거의 모든 단락에 빼곡히 들어가 있는 출처 각주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40페이지가 넘는 각주 목록은 단 하나의 사실도 근거 없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확신을 줍니다.

마무리

어쩌다 보니 호들갑을 떨며 책을 홍보하는 사람같이 되었지만, 재밌으니까 읽어 보세요. 츄라이 츄라이. 마무리는 책의 맨 처음에 나오는 인용문을 재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미정의 존재로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유일한 사람으로 형성되어 가는지를 비유한 말인데, 그 형성의 모든 과정에서 우리의 뇌는 '우리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죠.

모든 사람은 여럿으로 태어나 하나로 죽는다. – 마르틴 하이데거 (1889-1976), 철학자



Dani Soohan Park (@heart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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