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이야기
친구들이 블로그를 쓰길래 조금 의욕이 샘솟아서 저도 아무 말이나 써 보기로 했어요. 다시 꾸준히 쓸 거창한 결심 같은 건 없습니다. 그냥 지금 쓰고 싶은 김에 쓰고 깔끔하게 잊어버릴 거예요. 작심삼일이 되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작심을 하지 않는 거죠.
작년 10월에 호치민 국제공항에서 환승을 하다가 핀(phin)을 하나 업어왔습니다. 대충 베트남식 커피 필터입니다. 베트남에서는 맨날 아침에 핀으로 커피 우리면서 담배 한 까치 태우고 출근하는 문화가 있다는데 왠지 멋있어 보여서 저도 해 보기로 했습니다. 오천 원도 안 했던 것 같은데, 이걸 써먹어 보려다가 그라인더까지 들이게 되었습니다. 비싼 전동 그라인더를 나눔해 주신 S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S님의 강아지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라인더에 흰털을 좀 묻힌 것 외에 딱히 보탬이 된 것 같지는 않지만 귀여우니까요.
아무튼 이게 뭐냐면 대충 커피가루를 넣고 물을 부으면 커피가 나오는 물건인데 (아무래도 그렇겠죠) 지금까지는 분쇄원두를 사서 썼지만 저는 커피를 기껏해야 1주일에 한두 번 우려먹기 때문에 원두 봉투가 비어갈 때쯤엔 커피가 아니라 숯차가 되어 있었습니다. (숯차를 드셔보셨나요? 이름 그대로 식용 숯을 물에 타먹는 건데 모든 새로운 경험이 삶을 풍족하게 하는 것은 아님을 가르쳐주는 맛입니다.) 그리하여 그라인더를 구한다 하였더니 오랜 트친이신 S님께서 황공하게도 뉴비를 구휼하고자 그라인더를 하사하심에 일이 여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물건을 쓰려면 커피를 얼마나 곱게 갈아서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다들 말이 다르다는 거였습니다. 베트남 바리스타를 직접 인터뷰한 영상을 봤더니 정석은 없고 베트남에서는 사람마다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맞는 말이라서 화가 났습니다. 세상 만사에 정답은 없는 법이지만 분명한 오답은 있고 지금 무지몽매한 한국인이 풀악셀을 밟고 오답으로 직진하려고 하는데 도움이 하나도 안 되잖아요! 베트남 사람한테 김치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그거 정석은 없고 대충 사람마다 나름의 방법으로 배추에 소금이랑 양념 치면 된다고 하면 멀쩡한 김치가 나오겠어요? 근데 생각해 보니 저희 외할머니도 저한테 김치는 대충 배추에 소금이랑 양념 치면 된다고 가르쳐 주시긴 하셨어요. 이래서 전문가들이란.
그래도 최소한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는데, 커피를 곱게 갈아야 한다더라고요. 그래서 기세등등하게 제일 곱게 갈아 봤습니다. 분쇄원두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대로 무시하고, 핀에 커피를 채우고 물을 넣고 들뜬 마음으로 씻고 왔더니 커피 가루가 그대로 반죽이 되어서 한 방울도 우러나지 않은 채로 식어가고 있더라고요. 핀을 뒤집어도 떨어지지 않아서 긁어내야 했는데 아주 쫀득했습니다. 두바이쫀득쿠키에 이은 왕십리쫀득커피의 탄생의 순간을 여러분께 공유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조금 덜 곱게 갈아낸 두 번째 커피는 조금 더 거친 반죽이 되었고, 세 번째가 되어서야 드디어 30분에 걸쳐 아주 천천히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속도로 우러난 커피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아주 쓰고 미적지근하지만 의외로 맛있었습니다. 좀만 더 멀쩡히 우리는 데 성공하면 아주 맛있는 커피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오기에 사로잡힐 뻔했지만 이만큼의 카페인을 한 잔 더 마시면 오늘 저녁을 집이 아니라 영안실에서 맞이할 것 같아서 진정하기로 했습니다.
언젠가 핀으로 제대로 된 커피를 만들 수 있게 되면 레시피를 공유해 볼게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진정한 커피를 만드는 데에는 정답이 없다. 당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만들어낸 한 잔의 커피만이 당신에게 완벽할 수 있음을 알기에 이 글에서 자세한 방법을 공유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이다...”
Dani Soohan Park (@heart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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